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 말로리 (문단 편집) == 75년만에 발견된 시신 == >"8,100m 지점에 웬 영국인 시체가 있었다. 영국인인지 어찌 아냐고? 당연히 [[유니언 잭]]이 다 찢어지긴 했어도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채로 있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에베레스트에 시체는 별것도 아닌지라 대충 보고 지나쳤다." >ㅡ 왕홍보. 그리고 세월이 지나 [[1975년]] 중국의 산악인 왕홍보가 에베레스트를 등정할 당시, 목격했던 게 알려지기 시작한다. 왕홍보는 에베레스트 등정일로 알고 지내던 일본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그 이야기를 일본인 등산가 하세가와 료텐이 글로 써서 발표하며 그가 혹시 말로리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했다. 안타깝게도 이 둘 역시 훗날 에베레스트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1980년대]]부터 말로리의 시신을 찾기위한 등정대가 조직되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99년]] [[5월 1일]] 오전 11시 45분. 에릭 시몬슨이 이끌던 조지 말로리 시신 수습 작업 등정대에 참가한 미국 [[산악인]] 콘래드 앵커는 에베레스트 북동릉 8,138m 지점 약 30도 경사진 곳에서 앞으로 넘어진 채 숨진 모습의 시신을 발견했다. 앵커는 시신의 옷 주머니에서 손수건에 곱게 싸인 편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조지 말로리의 것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X-y9Ve-buM|한국 내셔널 지오그래픽 한글 자막 영상]] [[BBC]]가 스폰서로 참여해서인지 BBC는 특종으로 이걸 보도했고 생생하게 방송 카메라로도 시신이 나왔다. 추운 기후인지라 75년이나 되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시신은 제법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얼핏보면 이건 무슨 마네킹이 아닐까 하는 형체로 남아있었는데, 옷이 찢어져 노출된 피부가 오랜 세월 강한 직사광선에 탈색된 것으로 보인다. 대원들은 조지 말로리를 감고 있던 로프를 제거한 후 주머니에서 [[고글]]과 [[나이프]], [[가위]], 성냥, 행동식 양철캔, 손가락부분을 잘라낸 장갑, 보겔손목시계, 고도계, 등산화 등을 [[https://blog.naver.com/worldphoto/220485038003|회수했다.]] 그리고, 주변의 흙과 돌을 모아 시신을 덮어 간단히 무덤을 만들었다. 위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동영상에서 볼 수 있듯, 촬영 후 무덤을 만들어 돌과 흙으로 덮었기 때문에 현재는 근처를 지나가도 무덤과 비석을 볼 수 있어도 시신을 볼 수는 없다. 흙에 파묻혀 있던 얼굴 부분은 고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파내거나 찍지 않았다. 시신을 발견했지만 수습하지 않고 현지에 그대로 묻은 것은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망한 나라에서 장례를 마치고 비석을 세우는 영국의 전통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시체가 수백킬로그램 무게로 꽁꽁 얼어서 도저히 가지고 내려올 수 없다는 점도 있긴 하다. 엄홍길만 해도 2005년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하산 도중 사망한 후배 박무택, 백준호, 장민의 시신을 나중에 재방문 하여 발견했음에도 너무나 무거워 겨우 양지바른 곳에 시신을 옮겨가 직접 돌무덤을 만들어 묻어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관심거리였던 카메라[* 등정 당시 원정대원에게 빌린 [[코닥]] 사의 [[https://blog.scienceandmediamuseum.org.uk/wp-content/uploads/2014/03/vest-pocket-autographic-kodak-special-camera1.jpg|Vest Pocket Autographic Special 모델]] 카메라.]는 결국 발견되지 않았다. 때문에 [[https://youtu.be/EX-y9Ve-buM|이 영상]]에서와 같이 말로리가 리더였고 어빈이 보조였기에, 사진을 어빈이 찍고 가지고 있었을 수 있다고 추측한다. 어빈의 시신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는 말로리와 어빈은 실패했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원인은 1920년대의 기술력 부족을 꼽는데 현대에 비해 너무나도 장비가 부실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동영상에서 발견된 말로리가 입었던 옷의 재질은 개버딘(Gabardine)으로 날실에 [[양모|양털]], 씨실에 [[무명]]을 이용해 만든 직물이다. 유래는 영국의 [[버버리]] 사에서 트렌치 코트의 원단으로 개발한 것이다. 이 코트는 현대 정장의 조상격이며 많은 남성용 의복을 파생시킨 '''군복'''이었다. 정복은 과거엔 [[전투복]]이었고, 정복 셔츠는 전투복 상의, 정복 바지는 전투복 바지, 정복 겉옷은 [[방한복 상의 외피|야상]], 정복 구두는 [[스웨이드]] [[전투화]], 정복에 입는 롱코트는 [[방한복|스키파카]]의 직계 조상이다. 재질은 [[고어텍스]]로 바뀌는 등 몇 가지만 달라졌을 뿐 사실 큰 차이는 없다. 조지 말로리를 포함한 탐험대는 최첨단 등산복을 입고 등정에 올랐다. 단지 에베레스트가 당대의 기술력을 한계까지 밀어붙였을 뿐. [* 이와 똑같은 방한복을 입고 남극점에 도전한 인물이 바로 [[로버트 스콧]]이었다.] 그 밖의 실패 이유로 꼽히는 점은 산소 장비, 그리고 '극지법'과 극지법의 발전이다. 또 하나는, '세컨드 스텝을 돌파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이야 사다리를 설치해서 쉽게 올라가지만 티베트 방면으로 초등정을 했던 중국팀은 '수많은 대원들이 서로의 어깨를 밟고 고정사다리를 설치하고 나서 올라가는 방법으로 돌파'했었고 이후 이들은 '사다리 없이는 돌파가 불가능하다'고 공언했고 오랫동안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다. [*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도, 콘래드 앵커가 이후에 직접 등반하여 증명한 바와 같이 이 구간은 사다리 없이 프리클라이밍으로 등반이 가능하며, 말로리의 경우 당대 영국 등반가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프리 클라이밍에 능한 타입이었다. 실제로 콘래드 앵커는 이 구간 등반 후 '말로리의 등반력으로 등반이 가능한 구간'이라고 평가하였다.[br][br]그렇지만 말로리와 콘래드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여야 한다. 말로리에 비해 콘래드는 기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훨씬 여유로운 상황에 있었고 콘래드는 세컨드 스탭에 대한 지리적 정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말로리는 어떠한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라인홀트 매스너 또한 자신의 저서에서 말로리가 등반하던 1924년의 클라이밍 기술과 장비로는 세컨드 스탭은 도전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다 라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때, 조지 말로리와 24년 원정대는 에베레스트 등반사에 가장 뜨거운 논란의 주인공으로 남을 자격'은' 충분하다. 덕분에 지금도 여전히 말로리와 어빈이 가장 먼저 올랐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